오래 그린다는 것 — 웨인 티보 《The Order of Things》를 보고
웨인 티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전시장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화가라는 것. 케이크와 파이처럼 달콤한 음식을 그린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는 것. 그리고 100세가 넘어서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는 것.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대략 그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 DDP의 웨인 티보 전시는 이미 알고 있던 작가를 확인하기 위한 자리라기보다, 그동안 몇 장의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한 사람의 작업을 처음부터 천천히 마주해보는 시간에 가까웠다.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까지 나에게 웨인 티보는 여전히 ‘케이크 그림을 그린 미국의 화가’였다.
하지만 전시장을 나오면서 머릿속에 가장 오래 남아 있던 것은 케이크도, 파이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일을 계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케이크 그림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
처음에는 역시 익숙한 이미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케이크와 파이, 진열된 음식들.
이미 여러 번 이미지로 접했던 그림들이었지만 실제 페인팅 앞에 서니 생각보다 느낌이 달랐다.
특히 물감의 두께와 화면의 질감이 먼저 보였다.
사진으로 볼 때는 색과 형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면, 실제 작품에서는 붓과 물감이 만들어낸 표면 자체가 훨씬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작품을 보면서 이것이 왜 중요한 그림인지, 미술사 안에서 어떤 위치를 갖는지를 하나하나 생각하려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냥 그림 앞에 조금 오래 서 있었다.
어떤 그림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계속 보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런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케이크라는 친숙한 소재 때문에 편하게 다가갔다가, 가까이에서 페인팅의 흔적을 보고, 다시 조금 떨어져 화면 전체를 보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 그 특징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내게 더 중요했던 것은 그 그림을 보면서 시간이 조금 느려졌다는 사실이었다.

몇 걸음 사이에 놓인 수십 년
전시장을 따라가다 보니 케이크와 파이만 있던 화면에서 점차 다른 장면들이 나타났다.
인물이 있었고, 도시가 있었고, 풍경이 있었다.
웨인 티보는 음식 정물뿐 아니라 인물, 샌프란시스코의 도시 풍경과 캘리포니아의 풍경도 꾸준히 그렸다.
하지만 작품의 장르가 달라지는 것보다 더 크게 느껴진 것은 시간이었다.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는 한 사람의 수십 년이 불과 몇 걸음 안에 압축된다.
젊은 시절의 작업을 보고 몇 걸음 옮기면 훨씬 뒤에 제작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관람객에게는 몇 분이지만, 그 사이에는 작가가 실제로 살아낸 수십 년이 있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작품을 보는 방식도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무엇을 그렸는지를 보고 있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이 사람은 이 그림을 그릴 때 몇 살이었을까’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 그림과 다음 그림 사이에는 어떤 시간이 있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생각보다 훨씬 일찍 시작된 작업의 시간
전시를 보고 나서 웨인 티보의 삶을 조금 더 찾아보게 됐다.
그가 그림과 관련된 일을 시작한 시점은 생각보다 훨씬 이르다.
10대 시절 영화관 포스터와 간판을 만드는 일을 했고, 16세 무렵에는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부서에서 인비트윈 작업을 경험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군에서 아티스트와 카투니스트로 복무했고, 전역 후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미술과 교육을 공부했다.
처음부터 순수회화 작가라는 하나의 길만 걸었던 사람은 아니었던 셈이다.
상업미술과 카툰, 광고와 교육을 거쳐 결국 자신의 그림을 계속 그렸다.
이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
지금 우리가 보는 긴 작가 경력만 놓고 보면 처음부터 자신의 길을 알고 평생 그 길을 걸어온 사람처럼 보이기 쉽다.
하지만 실제 삶에는 전쟁도 있었고, 직업도 있었고, 다시 공부하러 돌아가는 시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림과 이미지를 만드는 일은 계속 그의 삶 안에 남아 있었다.
100세에도 작업한다는 것
웨인 티보가 100세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시를 보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티보는 1920년에 태어나 2021년까지 살았다.
그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대단히 오래 활동한 화가라는 생각 정도였다.
그런데 전시장에서 실제로 여러 시기의 작품을 이어서 보고 나니 숫자의 의미가 달라졌다.
80년에 가까운 시간.
10대부터 이미지와 그림을 만드는 일을 시작해 100세가 넘어서도 작업을 계속했다면, 그것은 사실상 한 사람의 인생 대부분이 한 가지 영역과 함께 있었다는 뜻이다.
나는 그게 꽤 부러웠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처음에는 좋아해서 시작한 일도 직업이 되면 다른 의미가 생긴다.
생활 때문에 그만둘 수도 있고, 환경이 바뀔 수도 있고, 몸이 따라주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계속할 수 없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한 가지 일을 80년 가까이 지속했다는 사실은 노력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마음도 있어야 하고, 계속할 수 있는 환경도 필요하고, 건강도 따라줘야 한다.
그리고 분명 운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웨인 티보는 꽤 많은 행복과 운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내가 그의 삶 전체를 알 수는 없다.
그가 실제로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누군가 대신 판단할 수도 없다.
다만 자신의 삶 대부분을 그림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내 일을 생각하게 됐다
웨인 티보의 긴 작업 시간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나 역시 오랫동안 미술과 디자인을 기반으로 일을 해왔고, 이제 40대에 들어섰다.
요즘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미술과 디자인처럼 감각과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업에서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때때로 커리어의 끝을 먼저 상상하게 만든다.
지금처럼 계속 일할 수 있을지, 몇 년이 지나면 현장에서 요구하는 감각과 내가 가진 감각 사이에 거리가 생기지는 않을지.어쩌면 어느 순간 다른 일을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웨인 티보의 전시를 보고 나니 질문을 조금 다르게 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비슷해 보이지만 꽤 다른 질문이다.
같은 일을 계속한다는 것은 같은 방식으로 일한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웨인 티보 역시 10대 시절부터 100세까지 정확히 같은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애니메이션을 했고, 상업미술을 했고, 광고 일을 했으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동시에 자신의 회화를 이어갔다.
결국 평생 이어진 것은 하나의 직책이나 작업 방식이라기보다 이미지를 만들고 그림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이 점이 내게는 꽤 중요하게 느껴졌다.
나 역시 지금과 똑같은 방식으로 앞으로 20년, 30년을 일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직접 현장에서 움직이는 비중이 줄고, 기획과 디렉팅의 비중이 커질 수도 있다.
경험을 전달하거나 다른 사람의 작업을 이끄는 일이 더 많아질 수도 있고, 지금과 전혀 다른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형태의 시각 작업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결국 미술과 디자인이라는 영역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면, 그것 역시 같은 커리어의 연장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니 40대라는 숫자를 커리어의 끝과 바로 연결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해온 일을 앞으로 어떤 형태로 이어갈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시기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전시장을 나온 뒤 남은 것
DDP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내게 웨인 티보라는 작가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만든 전시는 아니었다.
여전히 내가 모르는 작품과 이야기가 훨씬 많다.
하지만 꼭 모든 전시가 작가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전시는 한 작품을 기억하게 하고, 어떤 전시는 새로운 작가를 알게 만든다.
그리고 가끔은 전시를 본 사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번 전시는 나에게 그런 전시였다.
케이크 그림으로 알고 있던 한 미국 작가의 작품을 보러 갔다가, 전시장을 나오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얼마나 오래 계속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그 질문은 조금 바뀌었다.
언제 끝날지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이어갈지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웨인 티보의 삶이 내 미래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평생에 가깝게 이어갈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를 보여줬다.
그 일을 80년 가까이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노력인 동시에, 큰 행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큰 행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시장을 나온 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케이크 그림도, 특정한 작품의 제목도 아니었다.
오래 좋아하고, 오래 만들고, 자신의 방식으로 계속해나가는 삶.
지금 내게는 그게 가장 인상적인 작품처럼 느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