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고명과 함께 젓가락으로 들어 올린 평남면옥의 메밀 함량 높은 냉면 면발 클로즈업. A close-up of the high-wheat-content noodles from Pyeongnam Myeonok's naengmyeon, lifted with chopsticks.

70년 전통 동두천 평남면옥,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의 평양냉면 맛집

누구에게나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는 ‘추억의 맛집’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 동두천의 ‘평남면옥’은 바로 그런 곳이다. 그곳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파는 장소를 넘어, 특정 시간, 특정 사람과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 하나의 서사가 된 공간이다.

팍팍했던 군 생활 시절, 짧디짧은 면회 외출의 허기를 달래주던 곳. 아버지와 마주 앉아 돼지고기 편육에 냉면 한 그릇을 비우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던 그 시간이 있었기에, 이곳은 단순한 식당 이상의 의미로 남아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7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이 노포(老鋪)는 동두천의 역사를 함께한 산증인과도 같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평남면옥. 과연 그 맛은 나의 흐릿한 추억 속 모습 그대로일까. 설렘과 약간의 불안감을 안고 가게 문을 열었다.

과거 평남면옥이 위치한 동두천 중앙동 골목은 근처 미군부대 덕분에 늘 활기가 넘쳤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오가며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던 곳이다. 하지만 이제는 부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가 되었다.
북적이던 거리는 사라졌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평남면옥은 변치 않는 맛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평남면옥의 존재감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의 냉면은 우리가 흔히 아는 서울의 우래옥이나 필동면옥 같은 고기 육수 베이스의 평양냉면과는 그 계보가 조금 다르다. 시원하고 톡 쏘는 동치미 국물이 주가 되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이 독보적인 스타일 때문에 평양냉면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지만, 한번 이 맛에 빠지면 다른 곳에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열성적인 단골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나의 선택은 언제나 그랬듯 물냉면돼지고기 편육이었다. 주문과 거의 동시에 내어주는 뜨끈하고 구수한 면수를 한 모금 마시니, 비로소 이곳에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 물냉면: 맑고 투명한 동치미 육수에 메밀면을 넉넉히 담고, 그 위에 오이채와 무김치, 계란 반쪽을 올린 단출한 모습. 첫 국물을 들이켜면, 잘 익은 동치미 특유의 강렬한 산미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하지만 이내 그 뒤를 쫓아오는 은은한 단맛과 깊은 감칠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첫인상이 낯설 수 있지만, 몇 번이고 국물을 떠먹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평남면옥 70년 내공의 진정한 매력이다.
  • 돼지고기 편육: 잡내 없이 아주 부드럽게 삶아낸 돼지고기 편육은 이곳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함께 나오는 묵은지에 따끈한 편육 한 점을 싸서 새우젓을 살짝 올려 먹으면, 새콤하면서도 깊은 맛의 김치가 고소한 돼지고기 기름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준다. 톡 쏘는 물냉면 한 젓가락, 그리고 고소한 편육 한 점. 이 둘을 번갈아 먹다 보면 어느새 그릇은 깨끗하게 바닥을 드러낸다.

이날 함께한 친구는 첫 방문이라 비빔냉면을 주문했다. 매콤달콤한 양념장이 동치미 육수와 자작하게 어우러진 비빔냉면은 물냉면과는 또 다른 매력을 뽐냈다. 친구는 “양념이 너무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입에 착 감기는 맛”이라며, 처음 맛보는 스타일임에도 정말 맛있게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평남면옥의 동치미 육수가 낯설게 느껴지는 평양냉면 입문자라면, 오히려 감칠맛 나는 비빔냉면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것 같다.

다만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다. 평남면옥의 냉면은 우리가 서울에서 흔히 접하는 ‘평양냉면’과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독특함이 누군가에게는 ‘인생 냉면’이 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렵다’는 평을 받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1. 육수의 차이: 강렬한 동치미 국물 베이스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육수다. 은은한 고기 육향이 중심인 대부분의 평양냉면과 달리, 이곳은 잘 익은 동치미 국물이 육수의 8할 이상을 차지한다. 그 덕에 첫맛은 짜릿할 정도로 강한 산미가 느껴진다. 이 톡 쏘는 시원함이 평남면옥의 가장 큰 매력이지만, 슴슴하고 구수한 고기 육수를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게는 너무 시큼하고 자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 2. 면의 차이: 막국수에 가까운 메밀면 면 역시 다르다. 쫄깃한 식감을 위해 전분을 섞는 일반적인 냉면 면발과 달리, 이곳의 면은 메밀 함량이 높아 툭툭 끊어지는 질감을 가졌다. 마치 강원도에서 먹는 막국수 면발과도 비슷한데, 이 덕분에 씹을수록 구수한 메밀 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탱글탱글하고 쫄깃한 면발을 선호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심심하고 익숙하지 않은 식감일 수 있다.

먼 길을 달려온 방문객들이 간혹 아쉬움을 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아는 ‘평양냉면’의 문법과는 다른, 이곳만의 독보적인 스타일을 이해하고 방문한다면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평남면옥은 여전했다. 톡 쏘는 동치미 국물도, 부드러운 편육도, 무심한 듯 친절한 가게의 분위기도 모두 나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앳된 군인의 모습은 이제 없지만, 변치 않는 냉면 한 그릇이 그 시절의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듯했다.

화려하고 세련된 맛집들 사이에서, 70년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평남면옥의 냉면은 단순한 음식이 아닌 하나의 ‘역사’다. 누군가에게는 낯선 맛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이자, 앞으로도 계속 찾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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